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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리뷰] 우연한 식탁의 기록2023.12.05

 

우연한 식탁의 기록


윤여일 사회학자(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지속가능사회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우연한 식탁


우연한 식탁은 제주시소통협력센터 다섯 번째 층에 위치한 공유주방 '모두의 식탁'에서 펼쳐진, 식사 만들기와 말요리 나누기의 워크숍이다. 참가자들은 전문 셰프의 지도 아래 제주의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그것을 먹으며 대화했다.

우연한 식탁은 제주시소통협력센터와 제주지역문제해결플랫폼 사무국이 협업해 '청년 1인 가구 및 먹거리 챙김이 필요한 이들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목표 삼아 시작되었다. 소셜다이닝 형태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제주에 거주하는 1인 가구와 먹거리 기본권에 어려움을 겪는 도민들에게 요리를 배우고 인간 관계를 넓힐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요리 배우기


1부는 요리 클래스다. COSI lab 대표 신정원 셰프가 참가자들에게 요리법을 전수한다. 1기와 2기가 각각 세 차례씩 진행되었으며, 거기서 배운 요리는 1기의 밀라노식 돈까스, 이탈리아식 오징어순대, 제주밭작물과 통닭구이, 그리고 2기의 제주 가을버섯 파스타, 이탈리아 사냥꾼의 닭요리, 치즈를 품은 등심구이였다. 신정원 셰프는 친환경 당근, 키위, 감자, 돼지, 닭 등 제주의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해 요리를 시연하며 각 재료의 특성과 맛을 자상하게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2인 1조로 팀을 이뤄 요리의 각 단계를 따라했다. 한쪽에서는 당근을 씻고, 다른 쪽에서는 키위 껍질을 벗기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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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하기


요리가 완성되면, 우연한 식탁은 이탈리아 식탁처럼 수다스러워진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만든 음식을 나누고 이제 이야기도 나눌 차례다. 우연한 식탁은 참가자들이 요리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자신도 보다 알아가기 위한 워크숍이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사회적 배경이 다양하고 참가의 동기도 저마다 달랐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음식을 차려주고 싶으나 시간에 쫓기는 워킹맘,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가족을 위해 특별한 요리를 배우려고 했던 육아휴직 중인 아버지, 가족에게서 떨어져 혼자 살게 되어 요리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직장인, 제주로 이직하며 귀농 귀촌에 관심을 갖게 된 입도민. “요즘 부쩍 불안함을 느끼는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원인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던 생활자. 여러 사연들이 모여들었다.


워크숍


나는 2부의 수다하는 워크숍을 주재했다. 요리 배움터에 이어 말의 워크숍이 펼쳐지기를 바랬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홀로 있다면 알기 어렵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여러 관계가 필요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면 다양한 활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알려면 타인, 관계, 상황이 필요하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살펴보는 워크숍이기를 바랬다. 자신이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 타인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귀 기울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지금을 미래에 기억될 이정표로 만들고자 했다.


질문들


첫 시간의 처음 장면에서는 참가자들의 성향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함께 웃어볼 요량으로 간단한 OX 퀴즈를 꺼냈다. “나는 최근 일주일 사이에 장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최근 한 달 사이에 생선을 사 본 적이 있다.”, “나는 여행 때 볼거리와 먹을거리 중에 고민스러우면 먹을거리를 선택한다.”, “나의 냉장고에는 채소가 많다.”

이어서 준비해둔 질문함에서 참가자들이 접혀 있는 종이를 골라 펼치면 음식을 소재로 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힘들 때 먹는 '위로 음식'은 무엇인가요?”, “일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 시간은 언제인가요?”,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나요?”, “음식을 통해 어떤 기쁨을 얻나요?”, “음식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얻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요?”, “특별한 날이나 이벤트에서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직접 만들어 먹는 데 성공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일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조리 방법은 무엇인가요?”, “음식을 먹을 때 주로 어떤 분위기나 상황을 선호하나요?”, “여행 갔을 때 음식을 탐험하는 방식은 어떠한가요?”


단어들


두 번째 시간부터는 지난 시간 나왔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채록해 음미할 구절로 제공했다. 각 참가자의 개성이 담겨 있고, 이미 지난 시간에 함께 들어서 공동의 기억이 간직된 문장들이다. 이것을 말요리를 할 때 사용할 말재료로 삼았다. 거기에 독특한 말의 향신료도 첨가하기로 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다소 추상적인 단어들.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단어를 사용한다. 색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때론 색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다면, 자신에 대해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여느 때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자갈을 연못에 던지면 자갈의 형태와 무게에 따라 파문이 달라지듯 단어는 일종의 지향성을 지닌다. 낯선 단어를 경유해야 하면 이야기는 다른 궤적을 그릴 수 있다. 나는 함축성과 운동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두 음절짜리 추상명사들을 준비했다. 참가자들은 이 중에서 서너 가지 단어를 골라 말재료와 버무리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말요리를 지어냈다.

“외부 비밀 영감 수동 결심 약속 체념 놀람 무력 불화 예감 심연 도약 감전 충전 연루 공명 감수 감응 곡절 사연 실험 시선 세계 여성 남성 기록 멸종 생태 언어 물음 이름”


 

질문들 아래

 

질문들 아래 2

   
   

먹고 사는 문제


모두가 "먹고 사는 문제"로 궁리 중이었다. 한 참가자는 직장을 구하며 제주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이제껏 어머니가 음식을 해주었기에 혼자서 요리를 한다는 게 큰 도전이었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레시피를 따라해보기도 했지만 주방에는 결국 쓰지 않는 양념들이 쌓여갔다. 다른 참가자는 혼자 사는 일상에서 음식을 지어먹는 게 번거로워서 자주 식사를 거르다가 건강이 우려스러워졌다. 몸에 좋은 음식을 찾다가 친환경적인 삶과 귀농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홀로 먹고 사는 이야기는 음식을 통한 관계성 형성에 대한 기대로 번져갔다. 무엇을 먹는지만이 아니라 어디서 누구와 먹는지도 중요하다. 즐거운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바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하고픈 마음. "혼자가 되니까 배가 고프면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아서 밖에서 먹고 들어가곤 해요. 옆에 누군가 있다면 해주고 싶겠지만, 혼자 있으면 마치 스위치를 바꾼 것처럼 잘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어디서 누가 어떻게 길러낸 식재료인지에 대한 관심. "농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랑 받고 자란 음식'이란 그런 노력이 담긴 재료로 정성껏 지어낸 음식이겠죠."


편의점 음식


“가장 자주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편의점 음식이죠. 회사 기숙사에서 살고 있어 주방이 없어요. 요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다 보니 밖에서 많이 사 먹고, 가장 쉬운 게 편의점이죠.”

아무래도 홀로 사는 직장인이 많다 보니 편의점 음식 이야기가 잦았다. 처음 들은 편의점 음식 이야기는 다소 쓸쓸했다. “편의점 음식은 맛이 다 똑같아요.”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편의점 음식도 다양한 취향으로 나누어졌다. 다양한 종류의 삼각김밥, 샌드위치, 떡볶이부터 단백질이 풍부한 두유나 비타민 공급을 위한 과일까지. 아침마다 들르는 편의점에서는 점원과의 반가운 인사, 하나둘 모여든 회사 직원들과의 즐거운 뒷담화도 있었다.

편의점 음식은 인생의 위로 음식일 수도 있었다. “제주살이에서 갑갑함이 컸던 시기에 이때를 버텨내지 못하면 육지로 간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더 있어보자 하면서 집에 있는 기타를 들고 시청으로 갔어요. 한쪽 구석에서 작게 노래를 부르다가 그냥 아는 사람도 없으니 목청껏 불러야지 싶었어요. 한 외국인이 지나가다가 한참을 들어주었어요. 그 사람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초코우유를 사다 주며 '잘 들었다'고 말했어요. 그 샌드위치와 초코우유가 당시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제주살이


그는 결국 제주에 남기로 했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제주 출신도 있지만, 이주해온 분들도 많았다. 그들은 왜 제주로 삶의 장소를 옮겼을까. 직장을 구하러 온 사람도 있고, 직장을 떠나온 사람도 있었다. 한 참가자는 라오스에서 느린 삶을 경험한 후, 귀국해서는 제주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연과 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고, 아름다운 경관과 다채로운 날씨도 여러 참가자가 들려준 공통된 이유였다.

느린 삶, 자연 접하기, 계절 감각을 향한 동경은 제주 음식과 로컬 식재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신정원 셰프가 말해주었다. 제주 음식 문화는 로컬의 신선함과 지역성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 특성상 로컬 재료의 신선함이 돋보이며, 이는 제주 음식의 맛과 가치를 높인다. 참가자들 중에는 제주의 다양한 농산물과 유기농 매장을 탐방하는 분도 계셨다. 신정원 셰프는 이탈리아 음식을 되도록 제주 식재료로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질 좋고 맛 좋은 다양한 식재료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상세히 소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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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어떤 장소에서의 식사 경험이 가장 특별하게 기억되나요?” “아빠랑 한라산을 간 적이 있어요. 등산을 진짜 싫어하는데 아빠는 산을 너무 좋아해서 아빠의 환갑이벤트를 해드리려고 갔어요. 저는 걸음이 느려서 올라가는 데 힘들었어요. 그 중간에 먹은 김밥이 너무 맛있었어요.”

음식은 살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음식은 확실히 기억과 긴밀히 닿아 있다. 특정 음식은 특별한 과거의 순간으로 그 사람을 돌려보내 그때의 추억과 감정을 불러낸다. 어린 시절 급식으로 나왔던 닭곰탕, 명절날 부산 가는 길에 들렀던 휴게소에서 먹었던 알감자, 엄마가 자주 끓여준 김치찌개.

참가자들 중에는 의식적으로 음식을 기억으로 옮기는 분들도 계셨다. 매일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이 습관을 십년 넘게 이어온 분도 계셨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유명한 가게에서 근사한 음식을 먹었다고 남들에게 알리기 위한 게 아니라 소박한 한끼더라도 그날의 경험과 그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 당시의 상황과 감정마저 되살릴 수 있다고 하셨다.

하루하루가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하루가 하루답게 조금씩 다를 때 그 삶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음식 사진을 통한 하루의 기록은 그러한 생활의 방편일 수 있다. 자기돌봄의 기술일 수 있다. 기록할 마음으로 음식을 대한다면 그 음식은 더욱 각별해질지 모른다. 맛과 분위기는 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자기 돌봄


“음식을 먹을 때 선호하는 환경은 무엇인가요?” “빨리 먹고 빨리 치울 수 있는 짧은 동선이요.”

첫 시간에는 홀로 살아가는 데서 요리 그리고 음식으로 겪는 현실적인 고충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끼니’를 ‘때우는’ 생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요리 그리고 음식을 달리 대하고 싶은 바람들이 펼쳐졌다. 자기 위로의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한 참가자는 라면이 아닌 잔치국수라고 답했다. 회사에서 돌아와 피곤한 날 라면을 끓일까 하다가 그것은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것 같아 애호박과 김치를 썰어넣고 잔치국수를 만들어 국물을 들이키며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라면은 조리일 뿐이나 잔치국수는 요리가 된다고 덧붙였다. 다른 참가자는 커피도 음식이라고 말했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천천히 내리며 갓구운 빵과 함께 즐긴다. 그로써 얻는 것은 포만감이 아닌 여유감이다. 혼자 식사하더라도 음식을 정성껏 접시에 담는다. 그로써 배만이 아니라 마음도 채운다.

우연한 식탁에서 얻은 공통의 인식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자신을 대하는 가장 직접적인 태도라는 사실이었다. 시간에 쫓기더라도 번거롭더라도 주방 시설이 마땅치 않더라도 그 조건 속에서 음식과 요리를 소중히 대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자기돌봄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