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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읍 함덕리 3편] 제주에서 느끼는 진정한 안식 _ 여행자 오정석2020.09.10


여행자|안식|자연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또 제주로 반평생 가까이 여행하며 살아온 자유인 오정석을 만났다. 

올해 나이 60인 그는 거처를 잡는 일반적인 여행이 아닌, 텐트치고 야영하는 여행을 통해 인생을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2020년 5월부터 7월까지 두 달여 간 함덕서우봉해변에 머물던 그는 이제 표선에서 1년간의 제주살이에 도전한다고 한다. 

제주의 매력을 조용한 ‘환대’, 그리고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안식’으로 느끼고 있던 그. 

자유인 눈으로 본 제주는 어떤 곳인지 들어보았다. 





자유의 시작

오정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9년에 미국 LA로 이민을 간 뒤, 2005년에 돌아왔다. 

LA에 위치한 매형의 가게에서 일하던 당시 LA폭동1)1) 흑인 로드니 킹(Rodney Glen King)을 집단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1992년 4월29일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촉발된 인종폭동.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어느 날 매형이 그에게 권총을 주면서 “오늘은 네가 당번이니 지붕에 올라가서 경비를 서”라고 하는 농담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때부터 미국까지 와서 무슨 꼴을 보려고 이 험한 상황에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과 함께 향수병이 생기면서, 

이민을 끝내기 전까지 6개월에 한 번씩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젊은 시절의 꿈을 접고 돌아오면서 그는 연어를 떠올렸다. 

결국 연어도 자기 살던 곳으로 온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또한 후유증이 있는지, LA를 그리워하며 LA와 가장 비슷한 환경을 찾아 제주도로 왔다. 






삶의 밑거름

이민을 마치고 바로 제주로 내려와 남원읍 태흥리에 있는 시골집을 구입했다. 

태흥리에 주소지를 옮기고 3년 정도 있었지만, 그 기간에도 서울과 제주를 오갔다. 

남원에 온전히 살았던 기간으로 따지면 6개월 정도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일손을 놓을 수 없어 렌트카 회사에서 운전을 했다. 

미국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확실했다. 

처음엔 외국인 손님 운전을 해주다가 한국인 사장님과 다니게 되었는데, 하인 부리듯이 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돌이켜 보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이렇게 만만치도 않은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 시기가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제주로

오래도록 혼자 살다 보니 주변 사람과 자신의 삶이 굉장히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경우 스스로만 건사하면 되는 상황이지만, 친구들은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가니 서로가 서로를 변했다고만 탓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의 결정적인 다툼도 있었지만 다시 제주로 내려온 결정적인 이유는 그 즈음 녹내장과 당뇨를 발견하면서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면서 편히 있는 것이 치유의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다툼을 핑계로 그는 2020년 5월 7일에 서울을 출발했다. 차를 가지고, 완도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나니 5월 8일이 되었다. 

주항으로 들어온 뒤, 함덕서우봉해변에 6월 말까지 텐트를 치고 지냈다. 

곧 제주에는 태풍이 오고, 야외에서 습하게 자는 게 힘든 계절이 오기 때문에 7월부터는 표선에 연세를 얻었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

자연을 벗삼는 그에게는 제주도 전체가 야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야영지가 아니라 팔각정, 해변에서 자도 딱히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 함덕서우봉해변에 텐트를 치는 게 불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을사람들이 무작정 내쫓지는 않아서 지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에 감사했다. 함덕은 해변 주변으로 민가가 있어서 다른 바닷가보다 습하지 않고 야영생활하기가 좋은 공간이었다. 

바로 옆 리조트를 즐겨갔다. 1층에 빨래방이 있는데, 빨래방이 3천원이라 싸고 화장실을 쾌적하게 쓸 수 있어 편리했다. 

근처에 있는 라면집에서는 2000원에 샤워를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 아침 길을 따라 함덕의 야경을 보면서 산책하고, 

서우봉에 정상에 올라가 우거진 숲 사이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는 의미 있는 일을 찾으려고, 

눈 뜨는 순간부터 바쁘게 머리가 돌아가잖아요. 

‘뭘 해야 될까? 내가 이렇게 안주해도 되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경쟁 상대예요. 

유명해진 친구, 성공한 친구들 보면서 나 자신에게 채찍질 하거든요. 

그러면 또 내 안에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근데 여기 오는 순간 그런 걸 다 내려놓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아요.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그런 것밖에는 없어요.





25년 전의 제주와 지금의 제주

그가 25년 전, 제주를 생각하면 그저 생존, 생존만 위해 살았던 사람들 같았고 섬 전체가 관광 외에는 굉장히 낙후되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최근 5년 전부터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문화적 의식 수준도 많이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내비친다. 

제주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자신만의 ‘안식’을 찾아가고 있는 오정석에게, 개발은 안식의 반대편에 서 있다.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 이유는 문명이 주는 혜택이 아닌 자연이 주는 행복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다시 유유히 길을 떠났다.




· 기획_제주시 소통협력센터/메모리플랜트

· 인터뷰_장혜령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