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시내에서 꽈배기 가게를 운영하며 대정현역사문예포럼의 이주일 이사와 함께 전시관의 관리를 병행하고 있는 김희만 씨를 만났다. 마을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재조명하고, 제대로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픈 마음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할아버지 故김묘생 어부는 대정뿐 아니라 제주 지역의 어업 조업 방식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일화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모슬포 토박이
김희만 대표는 모슬포 토박이다. 지금은 모슬포 시내에서 꽈배기 가게를 운영하면서 대정현역사문예포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바다 고기에 친숙했던 그는 동생의 수산식당을 이어받아 10년 정도 운영하기도 했었다. 그의 수산식당은 자리물회 철이 되면 손님들로 북적였고, 농번기에는 밭으로 배달 가느라 바빴다. 꽈배기 가게는 사람도 덜 필요하고 가게도 넓지 않아 식당 일을 할 때보다는 한결 수월하단다. 코로나의 타격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잘 굴러가는 중이다.
모슬포의 개혁가, 故김묘생 어부
김희만 대표의 할아버지 故김묘생 어부는 마을에 공덕비가 있을 정도로 모슬포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모슬포 초대 어촌계장으로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모슬포 어업의 주 수입원이던 방어와 멸치 수확량을 높이는 방법을 고안하는가 하면, 일본인들의 동력선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제주도민 중 최초로 동력선을 가지고 조업을 시작했다.
“자기가 애착을 가졌으니 바다 일이라면 뭐든 궁금해하셨어요.
어촌계 주 수입원이던 방어와 멸치 수확량을 높이는 방식을 고안하기도 하고요.
옛날에는 큰 배 하나에서 그물을 내려서 물고기를 뜨는 방식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작은 배 두 대를 이용해서 그물을 더 넓게 펼쳐놓고 기다리셨어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손재주가 뛰어나고, 뭘 봐도 이해가 빠르셨죠.”
故김묘생 어부가 바꿔놓은 모슬포 풍경
故김묘생 어부의 개혁은 모슬포의 어업 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원래 멸치잡이는 낮에 했는데, 동력선이 생기고 나서는 밤에 불빛을 이용해 멸치를 잡기 시작했다. 어두울 때 불빛으로 몰려드는 멸치의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여러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한 결과 수확량도 증가하고 더 신선한 멸치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이게 말이 쉽지 실패를 굉장히 많이 했겠죠.
멸치 잡을 때 위에서 그물 내리는 걸 ‘찻대’라고 하거든요.
이걸 처음엔 하나로 했다가, 두 개로 가기도 하고.
옛날에는 지금 같은 나일론 그물이 아니라 천이었어요.
배의 프로펠러 쪽으로 가면 천 그물이 감기는 문제도 있었고요.”
마을의 기억 속에 자리한 故김묘생 어부
어릴 적 김희만 대표에게 故김묘생 어부는 늘 옆에 있던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김희만 씨의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돈벌이에 관심 없고 남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할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나서는 할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다. 故김묘생 어부는 늘 발명에 대해 고민하던 사람이었고, 작은 일이라도 꾸준하고 묵묵하게 하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김희만 대표는 감동을 받았다. 운구차가 돌 때 마을 사람 모두가 나와 인사를 한 것이다.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할아버지를 기리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진짜 인정을 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그는 전했다.
“집 옆에 철공소가 있었거든요.
배의 프로펠러가 굉장히 중요한데, 나이 드시다 보니 힘든 일은 못 하시고
선주들이 배에서 그걸 떼어오면 균형 맞추는 거, 닦는 거, 그라인더로 미는 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묵묵히 그런 작은 일들을 계속하셨어요.”
· 기획_제주시 소통협력센터/메모리플랜트
· 인터뷰_장혜령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