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정에 처음 진료소를 열어 20여 년간 수의사로 동물들을 살피고 있는 강성진 동물병원장을 만났다. 그는 마을에서 일찍이 농민회, 정당, 축제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최근까지도 지역의 ‘공수의사’를 맡아 가축으로 인한 전염병이 일어나지 않도록 소와 말, 돼지를 예찰하고 방역하는 일을 해온 그에게서 지역에서의 활동 경험, 그리고 앞으로의 바람을 들어보았다.
마을에서 수의사로 더불어 사는 법
강성진 원장이 90학번으로 수의학과에 입학할 당시 동물을 사랑해서 수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려동물 전문병원도 없고, 애견 문화도 없었던 때였다. 강성진 원장은 대학에서 농민의 어려운 현실에 더 관심이 많았고, 농민운동에 참여하고자 자퇴를 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에 다시 돌아가 학업을 이어 나가면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점점 자라났다. 대정에서 그는 공수의사로서 마을의 동물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공수의사는 동물 의료의 취약 지역에 임명되는 수의사다. 소나 돼지를 비롯한 지역 동물들의 건강이 이들에게 달려있다. 처음엔 반려동물만 진료하고 싶었다는 그였지만, 마을의 소를 진료해달라는 끊임없는 요청에 응하다 보니 자연스레 공수의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를 병원 앞으로 데려오면 봐주겠다고 돌려서 거절했는데,
한 10분 지나니까 소가 진짜 병원 앞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치료를 했더니 그 뒤로 소문이 나서
송아지가 강아지 입원실에 입원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대정에서 강성진 원장은 대부분 소를 진료했다. 일이 생기면 새벽에도 나가야 했고, 700kg은 되는 큰 소들 곁에서 일하며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그런데도 공수의사 일을 꿋꿋이 이어나간 그의 배경에는 다양한 마을 활동 이력이 있다. 그는 농민회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대정읍 초기 분회장과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를 맡기도 하고, 방어 축제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그에겐 주요한 삶의 동력이었다.
농약을 먹은 강아지부터 강아지에 물린 삼춘까지
거의 20년 동안 한 곳에서 수의사로 지낸 만큼 인상적인 사건·사고도 많다. 병원 개업 전날에는 농약을 먹은 강아지가 들어왔었다. 과수원집 아들이었던 강성진 씨는 농약 냄새를 바로 알아채 조치를 했고 강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고맙다며 90도로 인사하던 보호자의 모습이 아직도 그의 눈에 선연한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뱀에 물린 공작이 오기도 하고, 강아지에 물린 강아지도 찾아왔다. 어느 날은 강아지에 물린 어르신이 동물병원으로 잘못 찾아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헐레벌떡 70대 어르신이 동물 없이 혼자 온 거예요.
”삼춘, 뭘 치료해 마시?“ 했죠.
그랬더니 어르신 하는 말이,
”나 강생이한테 물려가지고.“
그래서 제가 ”삼춘, 사람은 사람 병원에 가야 됩니다.“ 했죠.”
'빨리빨리' 속에서 '천천히를 고수하는 일
대정의 동물병원은 변화를 맞고 있다. 강성진 원장도 그것을 체감하는 중이다. 6~7년 전부터 마을에 이주민이 많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대도시 병원의 처방 방식을 더 선호한다. 경쟁이 심한 대도시의 동물병원은 효과가 더 빠르고 센 약을 처방해주기 때문이다. 응급 처방 외엔 시간 여유를 두고 천천히 지켜보는 강성진 원장의 방식과는 정반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면서 철학을 고수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올 한해 이 지역에만 동물병원이 세 곳이나 늘었어요.
제가 철학을 고수하면, 손님들이 다른 병원으로 갈 수 있죠.
그럼 매출이 줄어드는데 직원 월급은 줘야 하니까
‘경쟁하진 말고, 내 철학을 고수해보자’고 생각했고
대신 부모님의 과수원 일을 병행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조화로운 마을을 꿈꾸는 수의사
강성진 원장은 여전히 마을활동가로서의 열정을 품고 있다. 그의 꿈 중 하나는 마을에서 인문학 강좌를 여는 것이다. 지역 안에는 세대 간 갈등,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같은 갈등 상황이 더러 발생한다. 그는 ‘어떤 삶의 방식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관 차이를 좁히기 위해선 지역사회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필요하고, 마을 인문학 강좌가 움직임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실버 국악 관현악단을 만드는 꿈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조화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마을 사람들과 활발히 관계 맺는 것은 그에게 삶의 목표이자 행복이다.
“마을에서 인문학 강좌를 해보고 싶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버 국악 관현악단을 만드는 것.
제가 성당에서 노인대학 학장을 맡고 있거든요.
그분들이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면 아드레날린이 솟아요.
아내는 제가 이런 얘기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고 하죠.
· 기획_제주시 소통협력센터/메모리플랜트
· 인터뷰_장혜령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