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뷰

  • HOME
  • 소식알림
  • 현장리뷰
[기획이슈] 버려진 가스저장소의 대변신2022.12.27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지는 건물이 많다. 규모가 큰 근대건축물은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가소메터 시티(Gasometer City)는 장장 13년의 시간을 들여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탈바꿈했다.

 

도심 속 애물단지로 전락한 근대건축유산 

도시를 재생하려면 오래된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할까. 유럽의회는 오랜 논의 끝에 1975년 ‘건축유산에 관한 유럽헌장’을 발표한 바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축약하면 오래된 건물 즉, 건축유산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가치를 지닌 자산이라는 것. 그런 까닭에 유럽 국가들은 아무리 낡고 오래된 건물일지라도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철거나 증축을 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베토벤, 모차르트 등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Viena)도 마찬가지. 시 전체를 ‘고전주의 건축물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세계가 주목하는 건축유산이 즐비하다. 

그중에는 도시재생 건축의 성공사례로 손꼽히는 가소메터도 포함된다. 나란히 서 있는 4개의 거대한 원통형 건물은 시 전역에 가스를 공급하는 저장소로 100년 넘게 쓰였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건설한 빈의 첫 근대적 사회기반시설로, 오랫동안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 당국의 천연가스 도입 정책에 따라 1986년 문을 닫았다. 시에서는 근대건축유산으로 보존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시민들이 이를 반대했다. 내로라하는 건축유산이 즐비한 데 가동을 중단한 산업시설까지 굳이 남겨둬야 하냐는 것. 더욱이 가스저장소가 위치한 짐머링(simmering) 주민들은 안 그래도 낙후된 산업단지에 폐건물까지 방치되면 더욱 쇠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소메터는 187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건설한 사회기반시설로서 도시 전역으로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저장소였다.


문화와 역사를 품은 재생건축의 과정

시 당국은 ‘가스저장소는 더는 작동하지 않으나 도시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보존하는 것이 옳다’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실제로 이 건물은 규모와 중요성을 고려해 대대적인 설계 공모를 통해 지어졌다. 아름다운 빈의 도시환경에 걸맞은 가스저장소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마치 대성당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려한 형태와 디테일을 지녔다.

그러나 막상 건축가들을 만나 재개발 협의에 들어가자 난항이 시작되었다. 일단 4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모에 적용할 만한 적합한 기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건축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더욱이 어려웠다. 오랜 고민 끝에 이들이 찾아낸 해법은 민간개발을 통해 시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당시 빈의 두드러진 사회 문제였던 주거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보존을 반대했던 시민들도 열렬한 찬성으로 바뀌었다. 

첫 삽을 뜨기 전부터 이목이 쏠렸다. 그동안 사용이 중단된 산업시설을 박물관이나 공연장 등으로 탈바꿈한 것은 많았지만, 이처럼 주거와 문화상업 시설을 갖춘 주상복합으로 변화시킨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 당국은 기본계획을 토대로 국제 공모를 진행했다. 경쟁 입찰을 통해 장 누벨(Jean Nouvel, A동), 쿠프 힘멜블라우(Coop Himmelblau, B동), 만프레드 베도른(Manfred Wehdorn, C동), 빌헬름 홀츠바우어(Wilhelm Holzbauer, D동)가 설계자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예전 건물의 외형을 남긴다는 조건 안에서 각자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대신 각각 따로 존재했던 4개의 동을 다리로 연결해 공간적으로 통합시켰다.




4개의 동을 각기 다른 건축가가 맡아 건물의 외형은 보존하면서고 내부는 완전히 현대적인 스타일로 바꿨다.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주상복합공간으로 재탄생  

3만9600㎡ 면적에 총 4동으로 이뤄진 가소메터 시티는 밖에서 보면 각각의 별개이지만 내부가 서로 연결돼 있어 실상은 하나의 건물과 다름없다. 그 안에는 이벤트홀, 사무공간, 쇼핑몰, 기숙사, 아파트가 어우러져 있다. 각 동의 강철지붕을 들어내고 유리 천장을 설치해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자연광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는 A동은 오픈 스페이스인 중앙 보이드(void)를 마련해 각종 음식점, 옷 가게, 슈퍼마켓 등 다양한 생활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B동은 서쪽에 방패 모양으로 유일하게 새로 건축하여 덧붙인 형태로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새로 만든 현대적 건물은 학생 임대아파트로 운영 중이다. C동에는 지하주차장을 만들고, 주거공간마다 작은 정원을 조성해 울창한 녹지를 이루도록 했다. D동은 자료관과 극장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시 당국은 가소메터 시티가 완공된 이후에도 지원 정책을 바탕으로 거주민의 월세를 보조하고, 상가에 입점하는 업체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2001년 완공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사후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가소메터 시티의 일일이용자는 약 1만 3,000명에 달한다. 사람이 모여들면서 도심 내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던 짐머링 지역도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4명의 건축가가 따로 설계해 내부는 각기 다르지만 서로 연결돼 있어 실상 하나의 주상복합건물과 다름없다.



 

오래된 은행 건물의 대변신 ‘제주시소통협력센터’

낙후된 지역을 살리기 위한 대책으로 기존에는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밀어내는 재건축이 흔히 이뤄졌다. 하지만 요즘은 건물이 가진 이야기를 살려 건축재생을 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이다. 제주시소통협력센터는 원도심의 중심지를 오랜 기간 지켜온 은행 건물이 주민소통공간으로 탈바꿈한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공간 곳곳에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됐으며, 지하주차장을 설치해 접근성을 크게 개선시켰다. 특히 1층에 있던 옛 대형은행금고를 살려 센터가 그간 주민과 진행해온 사회혁신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물을 아카이브하는 ‘미래자산금고’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