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에 낸 타공을 통해 손바느질한다. 한 땀은 성취감, 다른 한 땀은 자존감이 고르게 실타래로 이어진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인생의 큰 전환점을 통과한 윤호영 씨는 오늘을 기꺼이 살아간다. 존재의 이유를 촌각을 다투며 느끼면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인생. 삶을 어떻게 그려나갈지는 각자의 실천에 달려 있다. 지난 제주생활공론에 참여한 팀장을 중심으로 각자의 구술로 기록한 인생 자서전을 시리즈로 공개한다. 그 첫발을 제주생활공론 손심엉 팀의 윤호영 팀장이 떼었다.
돌이켜보면 영화 같은 인생
어서 오세요. 여기는 D.D 가죽 공방이에요. 서귀포에 주거하는 집의 남는 방을 작업실로 꾸몄죠. 코로나19 때문에 상가에 입주하는 대신 마련한 공간이에요. 가죽 공예가 본업은 아니었어요. 혹시 영화 ‘돈의 맛’을 본 적 있으세요? 거기 주인공인 주영작 씨처럼 살았어요. 모 재벌 회장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는데, 제가 움직일수록 돈이 생기니까 하루 4시간 이상 수면해본 적이 없었죠. 점점 그런 삶이 싫어져서 울산으로 내려갔어요. 공대 출신의 전공을 살려 울산의 현대RB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사고가 났어요. 살아난 게 오히려 기적일 정도로요.
사우디아라비아에 출하할 유조선 파이프의 납기일을 맞추려고 야간작업을 하던 중이었어요. 관리자로 공장에 들어갔다가 크레인이 오작동했죠.이후 한 해에 11번이나 수술했어요. 부모님, 특히 어머니로선 포기가 안되었던 모양이에요.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현재 의족을 찬 상태예요. 제가 말하기 전엔 티가 잘 안 나죠? 이건 다 매일 훈련하는 재활의 힘입니다. 오전을 아침 식사 후 걷기 운동에 오롯이 투자하고 있어요. 보통 걸을 때 뒤꿈치를 땅에 딛고 앞꿈치를 대기 마련이잖아요. 의족이다 보니,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걸어야 해요. 그래야 일반인처럼 걸음이 어색하지 않아지죠. 보통 하체를 다치면 복부 비만율이 증가해서 식단 조절도 더불어 하고 있고요.
저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편인데요. 가죽 공예도 그의 소산이라 할 수 있어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아 퇴근하면 취미 생활에 여념이 없었거든요. 바리스타나 도자기, 가구공 등 자격증도 많이 땄어요. 그 중 가죽 공예가 가장 매력적이었죠. 도자기는 가마 시간에 맞춰 구워야 하는 시간제한이 따랐고, 가구공은 사포질 때문에 먼지가 너무 날려 집에서 하기 어렵더라고요. 가죽 공예는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가능해요. 손바느질하니까 마음이 차분해지고요.
사실 정상인으로 살다가 장애인이 되면 3단계의 불안이 찾아와요. 처음엔 아닐 거란 부정을 하죠. 이후 모든 게 싫어지는 분노가 와요. 마지막은 포기 단계입니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우울증이 오는 거죠. 이를 거친 후에야 적응기가 와요. 이게 대략 6~7년은 걸린 듯한데, 가죽 공예가 마음을 다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현재는 취미가 업이 되었고요.
나의 불편이 우리의 불편으로 건너가기까지
장애인이 되고 난 후 횡단보도의 신호가 짧은지 처음 알았어요. 보통 신호가 10초가 남아 있으면 뛰어가기 마련이잖아요. 전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습관을 길렀죠. 못 건너 간다는 걸 아니까요. 이 사이 다른 사람을 보게 돼요. 저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은 대부분 노약자가 많죠.
그는 스스로 한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다. 오직 그다음이 있을 뿐.
어느 날, 일호 광장에서의 일이 떠오르는데요. 파란 불이 켜져 횡단보도를 반쯤 걷다가 멈춰 섰어요. 할아버지 한 분이 횡단보도 초입에 여전히 머물고 계셔서 혹 제 도움이 부담스러울까 건너실 때까지 기다렸죠. 로터리에 차량이 많을 때였는데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더라고요. 이때 생각했어요. 몸이 덜 불편한 사람이 어르신을 지키는 게 좋겠다고요. 여기 공방 앞 도로가 6차선 내리막길인데요. 어르신의 무단횡단을 하루에 3~4건은 보곤 해요. 횡단보도까진 멀고 귀찮은 데다가 젊은 시절의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거죠. 어르신들에게 아무리 조언해봤자, 그게 고쳐지나요? 위험한데도 카트를 끌고 건너가시죠.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전 원래 일상의 불편을 바꾸려는데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요. 제게 일어난 일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저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시선이 간 거죠. 이게 제주생활공론의 주제를 ‘한봉투 챌린지&제주할망보호구역’로 잡은 이유예요. 아무래도 제주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운전하고 새롭게 유입되니, 쓰레기 양 줄이기 독려와 더불어 안전 운전 캠페인을 진행했죠. 처음엔 코로나19로 침체한 소상공인을 살리는 윈윈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이게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거로 생각해 팀원과 함께 추진했어요.
마음을 단단히 다져온 내공으로
요즘엔 출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장애인 분야의 창업 지원센터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는 행사에 참여하려고요. 제가 만든 펜은 비자림에서 나온 나무와 제주 말가죽 공예를 접목한 거예요. 제주 특산 기념품으로 좋을 것 같아요. 가방이나 지갑, 의자 쿠션 등 가죽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넓은 편입니다. 그리고 두세 명 정도 제자를 키우고 싶어요. 재능 기부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싶은데, 혼자서는 어렵거든요. 통상 나이 든 만큼 인생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죠? 그게 새로운 일이 없어 그래요. 할 일이 없으니 하루가 지난하게 여겨지는 거죠. 제가 제주에 내려온 계기가 아버지의 치매 간호 때문이었는데, 제주가 전국에서 치매율이 가장 높거든요. 어르신에게도 가죽 공예 수업이 일상의 변화 차원에서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사전에 치수를 계산해 디자인하고 100% 수작업한 작품. 재능기부로 카드 지갑(오른쪽) 클래스를 마련한 바 있다.
아마도 제가 당한 사고가 내면의 전환점이 된 거겠죠. 누가 생각하는 그 ‘성공’을 향해 부를 계속 쫓았으니까요. 다친 후 그게 모두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욕심이 없어졌거든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위에 눈을 돌리게 되었죠. 그런데 이게 참 경험하기 전엔 몰라요. 별일이 아닌 게 아니거든요. 그저 다리 하나가 없을 뿐이라고 보호장비도 잘 나오니 걸어 다니는데 문제가 없다고 처음엔 생각했어요. 잘 지낼 줄 알았는데, 머리는 그게 아닌 거예요.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 뿐이었죠.
저를 온전히 받아들인 후 수술한 병원에서 멘토로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일단 부모님이나 간호사를 다 그 자리에서 물려요. 그리고 딱 두 가지만 말했죠. “살기 싫으면 여기에서 뛰어내리고, 살고 싶으면 밥 먹고 다시 일어서라.” 괜찮아질 거라느니, 지원이 잘될 거라느니 하는 위로가 다 소용없어요. 어찌 보면 냉정한 것 같지만 딱 이 두 가지거든요. 살았을 땐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이왕 살 거면 행복하게 살아야죠. 즐겁게 말이죠. 그거 말고 뭐가 더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