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 착, 착. (사)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의 탐구로부터 다른 영역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구동을 떠올린다.
‘행복한 제주’란 원론적 목표의 기본이자 필수 바탕은 바로 인간의 권리. 인권 활동가와 환경 전문가의 특별한 공모가 시작됐다.
고제량 대표와 신강협 소장, 그리고 신현정 활동가. 이론과 현장, 서로 다른 전문 영역에서 탐구를 보완해나갔다.
이론과 현장의 기막힌 연결고리
‘발전’이란 말에는 더 나은 고지를 향해 달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잠시, 이는 무엇을 위한 발전인가.
경제적 성장이 발전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온 건 아닐까. (사)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의 탐구는 발전의 핵심에 대한 모색이었다.
“인권적인 관점에서 제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어요. 현재 속출하는 환경 문제는 결국 마을의 발전 사업으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상처받는 것을 보았죠. 제주에서의 발전은 여전히 거대 자본을 투자해서 경제적 이득을 확대해나가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의사 결정이 행정적인 절차로만 치부된 터라 사람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진행할 순 없을지 고민이 들었어요.”
발전은 경제 성장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이 향유할 권리와 자유를 증진시키는 수단이어야 한다. –발전권 선언
현장성을 배제하지 않는 인권 활동가인 신강협 소장. 탄탄한 이론을 기반으로 한 마을 탐구에 주력했다.
신강협 소장과 신현정 활동가는 지난 1986년 UN 총회에서 의결된 ‘발전권 선언’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발전이 권리라는, 즉 경제적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이 향유되는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인권을 기반한 접근법(HRBA)의 큰 핵심은 3가지. 주체를 밝히고, 그 주체가 의사결정을 해야 하며, 주체가 혜택의 당사자가 되는 향유를 누려야 한다.
여기엔 선흘1리에서 10여년 간 활동한 고제량 대표의 경험치도 합세했다.
“마을 주민과 공감하면서도 틀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발전이란 개념이었어요.
제가 보기엔 엄청난 발전인데, 지역 주민은 발전에 대한 체감을 못 느끼는 경우도 있었죠.
사실 선흘1리는 동백동산이라는 보존된 자연이 있고, 지역 주민이 이 공유자산을 주도적으로 보존하면서 마을의 복지향상이란 혜택으로 이어지고 있거든요.
발전의 개념 차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서로의 간극이 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다른 내공을 지닌 이들의 새로운 융합. 인권 기반의 의사결정 구조를 향한 최초 연구는 이론과 경험의 합작품을 예고했다.
발전의 개념, 다시 쓰기
이론을 바탕으로 탐구할 현장은 선흘1리. 이미 마을에 정통한 고제량 대표를 통해 공동체에 접근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론을 대입하기에 적합한 마을이었다.
마을 조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마을 이장과 부녀회장, 그리고 마을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제껏 어떤 의사결정을 해왔는지, 개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지 확대, 점검했다. 숙지한 발전권 선언에 따른 의사결정 구조를 기저에 깔면서 비교 분석해나감은 물론이다.
“마을 내 의사결정 구조를 주축으로 여러 가지를 물었어요. 공식, 비공식적인 조직들이 어떤 게 있고, 주민들이 어디에서 모여 어떻게 정보를 공유하는지 알아봤죠. 총회나 개발위원회, 부녀회에서 논의한 내용이 주민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지도요. 그리고 각자 생각하는 발전된 마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뜻밖에 마을 활동가들이 언급한 ‘발전된 마을’은 수익 사업이 활발한 형태가 아니었다. 선흘1리의 공동 목표는 동백동산의 보존과 주민의 행복. 과거의 삶과 관계가 녹아든 자연유산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원되어 현재의 자원으로 존재한다는 일념 아래다. 발전을 재정의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자연과의 관계성을 지속해서 이어가는 개념으로.
제주의 생태환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제량 대표. 선흘1리 주민에게 동백동산의 가치를 일깨우는 길잡이가 되었다.
“지난 2010년 이곳에서 주민역량강화 사업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우리가 불편한 것은 없애고 부러운 것은 가져와달라는 요구가 강했어요.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한 모습이었죠. 동백동산에 관해 공부하면서 달라졌어요. 각자 우리가 살아온 기억이 자연유산에 남아있고, 이를 접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죠.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이 생긴 거예요.”
마을 공동체는 살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때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선흘1리의 탐구를 통해 공동체마다 다른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선흘1리처럼 마을에서 선행되는 인권적 의사결정 방식을 재발견, 재해석하는 방법과 더불어 기초한 인권적 원칙을 마을에 대입하는 시도 역시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발전권 선언 및 인권을 기반으로 한 접근법에 관한 이론과 선흘1리 탐구 현장의 조화로운 결과물
이들의 과정은 현재 ‘수탈적 발전에 저항하는 발전의 권리’라는 하나의 결과보고서로 마무리되었다. 끝은커녕 시작이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숙제를 남긴 연유다. 고제량 현장 활동가는 이론을 지역에 적용해 인권이 존중받는 현실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보강하고 소통하면서 공동체의 회복을 꾀하자는 희망이다. 인권 활동가 둘은 다른 마을에도 적용할 수 있는 현실성을 보강하고, 발전권 관련 논문으로 발전시키는 내일을 꿈꿨다. 신강협 소장의 이 같은 아쉬움은 또 다른 의미의 기대였다.
“제주생활탐구를 통해 그간 머릿속으로만 했던 고민이 확실히 빠르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단순한 예산 지원만이 아니라 고민의 장에 대한 제도적 프레임을 제공해준 측면에서 좋은 기회였어요.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인터뷰 대상을 확대하고, 좀 더 치밀하게 결과를 분석했을 텐데… 결국, 다음 후속 작업을 기약하는 마음이 생긴 거겠죠?”